원래 게임 리뷰 같은 것 귀찮기도 하고, 재미로 하던 게임을 리뷰랍시고 쓰고 나면 다른 곳에서 하는 얘기 반복하는 게 아닐까 싶어서 잘 쓰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다 최근엔 가급적 취향에 맞지 않아서 피하던 장르의 게임들 위주로 공부하는 기분으로 플레이하고 있는데, 그러다보니 예전에 취향에 맞는 익숙한 게임만 하던 때보단 얘깃거리가 많이 생기는군요. 리뷰라고 거창하게 쓰기보다는 간단하게 정리하는 기분으로 슥슥 써두는 게 좋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렌지박스는 하프라이프 2 본편과 에피소드 1, 2, 포탈, 팀포트리스 2의 다섯개 게임을 한 패키지에 넣어 발매한 패키지의 이름입니다. 하프라이프 시리즈와 FPS 팬들에게는 꿈만 같은 구성이지만, 저는 FPS를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게 아니라 크게 기대하지 않았었는데…. 어쩌다보니 이 한 타이틀에 수개월동안 완전히 말려버리고 말았습니다. 패키지 내의 모든 게임을 새로 다 클리어해버린데다가 팀포트리스 2 같은 경우는 누적 점수 7000점이 넘었으니 말 다했죠.
오렌지박스의 개발 취지는 '짧은 개발 일정으로 자주자주 게임을 릴리즈하자'인 듯 보입니다. 에피소드 1의 커멘터리에도 이런 취지의 언급이 있기도 하고, 실제로 하프라이프 2 본편의 경우엔 개발에 5년 이상 걸렸으니까요. MMORPG도 아니고, 싱글 패키지 게임 개발이 5년쯤 지속되면 개발비도 개발비지만 마케팅 계획도 못 잡고, QA 사이클도 늘어지고, 개발팀의 사기도 떨어지고 갖은 문제가 많으니 그것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는 게 밸브의 본심 아닐까 싶습니다.
단순한 '포토리얼리스틱'이 아닌,
'무비리얼리스틱' 화면의 하프라이프 2
하프라이프 2를 처음 접했던 당시와 지금을 비교해보면 스스로가 정말 그 사이 FPS에 많이 익숙해졌다는 것을 느낍니다. 처음 하프라이프 2를 접했던 것이 2004년 11월인데, 재미있는 건 확실히 알겠지만 멀미기도 있는데다가, 빠른 속도로 다가와서 접근전을 벌이는 적이 나오니 손댈 수가 없어서 게임을 포기해버렸거든요. 플레이타임이 꽤 길었다고 생각했는데 올해 다시 플레이해보니 그때 중단한 시점이 대강 1/3 정도더군요.
출시한 지 벌써 수년이 지난 게임에 대해서 이런 점이 좋고 이런 점은 배울만하고 같은 걸 늘어놓는 것도 웃긴 것 같긴 한데, 그때 당시에 못 봤던 것들이 보여서 적어두자면, 뭐니뭐니해도 수년이 지나서 플레이해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그래픽에 풍부하고 센스 넘치며 친절한 게임 플레이가 인상적입니다. 이런 사람들과 같은 업계에 종사하고 있다는 게 두려울 정도로요.
퍼즐 요소를 알려주고, 푸는 방법을 익혔나 확인하는 간단한 퍼즐을 던져준 다음에 복잡한 퍼즐을 던져주는 원칙과 가야 할 방향에 적을 스폰해서 플레이어를 유도하는 원칙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 그리고 퍼즐을 풀어내는 플레이어가 자신이 지적인 것처럼 느껴지도록 만드는 센스엔 정말이지 감탄했습니다. 시나리오 면과 게임 플레이 면, 양쪽에서 예상치 못한 반전을 보여주는 후반부는, 보스전이나 후반부 플레이가 중반과 별 차이가 없는 북미 게임에서는 보기 드문 케이스기도 했구요.
발매 일정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듯한 인상의 에피소드 1
반면 에피소드 1의 경우는 상당히 실망했습니다. 하프라이프 2를 클리어한 부푼 가슴을 안고 에피소드 1을 이어서 플레이했습니다만, 적을 스폰시켜서 다음에 가야할 장소를 알려주는 하프라이프 2의 대원칙이 깨져 있어서 어딜 가야 할 지 헤매는 상황이 빈번하고, 퍼즐을 푸는 방법을 모르거나 처음 가본 장소에서는 거의 반드시 죽고 컨티뉴해야만 진행할 수 있는 경우가 많아서 전작에서 이어지는 친절함의 기대치에 크게 못 미쳐 실망이 컸습니다.
그래픽적으로는 HDR과 캐릭터의 림 라이팅 등이 추가되어 미세하게 좋아졌지만, 그 외엔 레벨 디자인도, 추가된 적도 모두 플레이어를 괴롭히려고 만든 것 같다는 느낌이 전해져서 에피소드 1을 플레이하는 시종일관 짜증을 주체할 수 없는 심경이긴 했는데, 같은 회사에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레벨 디자인에서 이렇게까지 차이가 날 수도 있구나, 레벨 디자인 상의 어떤 차이가 유저 플레이 경험에서는 큰 차이를 불러일으키는구나 등등을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하프라이프 2의 감각과 비슷하면서도
새로운 느낌의 에피소드 2
에피소드 1에서 좀 실망을 한 터라 에피소드 2에서는 기대치를 좀 줄이고 플레이를 시작했습니다. 에피소드 1에서 상당히 짜증 유발 캐릭터였던 알릭스가 에피소드 2에서도 시작부터 등장하길래 '역시나…'란 심정이었는데, 알릭스가 쓰러지는 장면부터 "이럴 줄 몰랐지?'라면서 뒷통수를 치더니만 뒤이어 투입된 외계인 아저씨의 아부인지 비꼬는 건지 헷갈리게 만드는 대사 센스에서 무릎을 탁 치게 만드네요.
이어지는 게임 플레이에서도 하프라이프 2의 감각에 가까운 플레이로 이어지는데, 애시딜리온이나 헌터같이 새로 투입된 적들도 꽤 흥미롭고, 갱도에서 앤틸리온을 방어하는 미션이나 헬리콥터를 격추하는 미션, 마지막 트라이포드 파괴 미션 같은 경우는 본편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습니다. 게임 플레이의 경우에는 어느 정도 하프라이프 2 본편에 근접한 정도가 아닐까? 하고 조심스럽게 평가할 수 있다면, 기술적으로는 새롭게 추가된 시네마틱 피직스가 매우 인상적입니다.
예상을 뛰어넘는 시네마틱 피직스
게임 극 초반에 포탈 스톰이 일어날 때 철로가 무너지는 장면이나 어드바이저가 날아가면서 지붕을 날려버리는 장면 등에서 사용된 시네마틱 피직스는 실시간에 계산하는 게 아니라 대규모의 물리 시뮬레이션을 미리 수행한 결과를 저장했다가 그대로 보여주는 것인데, 말로만 들었을 때보다 시각적 임팩트가 상당했습니다. 엔진의 한계에 제약받지 않고 아무도 본 적 없는 '무비리얼리스틱'을 추구하는 것이 밸브의 무서운 점이지요.
밸브 센스 작렬, 포탈
같은 오렌지박스 내의 게임과 비교했을 때, 포탈은 하프라이프 2 : 에피소드 2나 팀포트리스 2 같이 고정 팬이 있는 게임에 비해서 비교적 주목을 못 받은 게임인듯 한데, 개인적으로는 하프라이프 2 본편을 제외하고는 포탈이 가장 이노베이티브하다고 꼽고 싶습니다. 물리 엔진을 이용한 퍼즐이란 원체 만들기 어려운 장르를 밸브는 하프라이프 2 등에서 잘 풀었는데, 포탈에 와서는 그 감각이 그야말로 꽃피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플레이어는 포탈 건을 사용해서 벽이 있는 곳이라면 높은 곳이건 벽이건 천정이건 아무 곳이나 주황색 포탈과 파란색 포탈을 만들어서 두 포탈 사이로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데, 이 간단한 규칙으로 높은 곳에 도달하거나, 장애물을 뛰어넘거나, 적을 해치우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퍼즐을 풀어갑니다. 커멘터리의 설명을 보면, 어려워보이는 퍼즐을 하프라이프 2 본편과 마찬가지로 알려주기-배웠나 확인하기-응용시키기의 사이클을 밟아가며 익숙해지게 만드는 과정이 인상적입니다.
이것만 갖고 15개의 스테이지를 풀어놓은 것만 해도 굉장히 잘 만든 게임이라고 쳐줬을 텐데,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퍼즐 게임에 시나리오를 도입한 우주적 센스엔 정말이지 감탄할 수 밖에 없습니다. 퍼즐도 흥미롭고, 시나리오도 기대 이상의 재미를 안겨주고, 플레이하는 동안 게임의 가이드 역할을 하는 인공지능 컴퓨터 글라도스의 대사발도 백미이니 오렌지박스를 갖고 계시면서 포탈을 안 해보신 분들은 반드시, 꼭 한 번 플레이해보시길 권합니다.
몇달을 말렸습니다
팀 포트리스 2
오렌지박스의 마지막 게임은 팀포트리스 2입니다. 저도 원래 FPS를 잘 하지 못하고, 그러다보니 장르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케이스였는데, 팀포트리스는 하다보니 어느샌가 게임에 익숙해져서 정신차리고 나니 몇달이 훌쩍 가버렸더군요. 객관적으로 봤을 때 아주 쉬운 게임은 아닙니다만, 다른 FPS에 비하면 진입 장벽이 상당히 낮은 편입니다.
초보자가 게임을 플레이하고 팀에 기여를 하면서 게임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한 메딕이나 엔지니어 같은 직업군의 존재, 카툰 풍의 스타일리시한 그래픽, 어디서 누가 날 죽였는지 알려주는 점, 맵에서 어디로 가야할 지를 커다란 사인으로 알려주는 점 등이 다른 FPS에 비해서 진입 장벽을 크게 낮추지 않았나 싶습니다.
스튜디오 내에서 팀포트리스 2를 플레이했던 여성 유저분들이 꽤 있었는데, 이 중 하나만 빠졌더라도 그분들이 재밌게 플레이하는 건 어렵지 않았을까 싶어요. 최근의 카툰렌더링이라고 한다면 팀포트리스가 스타일 면에서 정점에 서있지 않나 싶은데요, 맵툴의 지원이 필요한 간접광 외에는 비교적 간단한 방법으로 구성되어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팀포트리스 2 렌더링 구현 문서[valvesoftware.com]를 참고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시그라프 스케치에도 나오고, 워낙 유명하긴 하죠, 이 문서?